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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금기, 탈주하는 형태

 

이선영(미술평론가)

 

도자 형식을 기본으로 여러 방법론을 접합하는 문혜주의 작업은 현대 속의 원시를 일깨운다. 도예라는 고풍스러운 분야를 전공한 작가는 도예가 현대성의 요구 또한 받음을 인식한다. 도예의 갱신을 위해 작가는 원시와 현대를 관통하는 보편성을 찾는다. 상품의 용기와 같은 현대 적 대상 속에도 깃든 영험한 기운들을 끌어내는 기법은 그러한 일회용 상품들은 물론 ‘예술’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방식이다. 작가는 무엇으로도 변형 가능한 흙덩이의 유연성을 살려 다른 재료와의 접합을 꾀한다. 이는 실험을 위한 실험이 아니라 때로 사회적 울림을 가지는 메시지를 위한 것이다. 최근 도자 작업에서 구멍 밖으로 나온 털처럼 수북한 것들은 마치 구멍 난 용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질 같기도 하다. 유기체 자체가 일종의 그릇이다. 작가는 페브리즈 병, 케찹 병, 소주병 등 실제의 모델에 바탕 한 일상의 용기(容器)들에 [무복을 입은 토우]라는 제목을 붙였다. 주술은 원시시대의 감수성 및 제도지만, 그러한 사고가 인간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다. 

현대의 상품은 물신 숭배의 대상이 되어야 비슷비슷한 기능을 초월해서 큰 이득을 남길 수 있다. 이 작은 형태들을 큰 화분 형태를 배경으로 쏟아질 듯 배치된 하얀 병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기우제]라는 제목은 물이 쏟아지는 기물의 형태를 활용한다. 그것은 유사함을 기준으로 서로를 연관 짓는 원시적 사고를 화분이나 일회용기 등 현대적 사물의 조합을 통해 표현한다. 마을 입구의 큰 나무에 둘러쳐진 주술적 장치 대신에, 작가는 자연의 축소모델인 화분을 세팅한다. 작가는 최신 사물을 오래된 방식으로 만든다. 여성의 노동이자 예술인 뜨개질의 방식도 혼용된다. 작가는 요즘 작업에 활용하는 짧은 뜨기 기법이 도자의 코일링 기법과 유사하다고 본다. 한편 흙으로 빚을 때 나는 자신의 손자국을 다시 짓눌러 삭제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확인하는 삶의 역설을 표현한다. 예술 또한 그렇다. 작가는 도예 작업이든 뜨개질이든 자신의 작업이 현대의 주요한 상품 유통의 회로에서는 벗어난 그림자 노동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흙과 섬유로 표현된 대상은 유령처럼 하얗게 남겨진다. 하얀 색조에 간간이 끼어있는 붉은 색은 희생을 떠올린다. 그림자 노동의 실체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식 영역에서는 그러한 노동을 그림자화, 또는 유령화 함으로써 지배 질서를 원활하게 유지한다. 여성이자 작가인 문혜주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동하는 상징적 우주에 작품을 통해 도전한다. 작업을 열심히 할수록 힘들어지는 상황에서 작가는 사회적 쓸모란 무엇인가를 따져본다. 아직도 사회는 예술작품을 작가의 주관적 배설물이라고 보는 것일까. 객관적이고 쓸모있는 것이란 무엇인가. 사회가 원하는 쓸모만 지향해도 망하는 판에 쓸모없음이라니, 예술가는 쓸모 있음과 없음에 사이에서 도박한다. 쓸모를 다하고 버려진 일회용기를 실제 크기와 형태 그대로 빚은 다음에 구멍을 뻥뻥 뚫어 이미 쓸모없어진 대상을 더욱 쓸모없게 만들고, 이러한 이중의 부정을 통해 생겨난 작품을 예술적 소통이라는 새로운 쓸모로 바꾸려 한다. 

요즘 작업에서 기괴하게 변형되어 기능을 상실한 의자 또한 마찬가지 맥락이다. 물건은 늘 인간과 비유되곤 한다. 신체를 감싸는 구조인 의자는 특히 그러한데, 문혜주의 작업에서 의자 형식을 빌은 작업은 인간이라는 종의 결정적 기능인 생식 또한 변형시킨다. 굳이 생식이 있다면 그것은 유성생식이기 보다는 무성생식, 즉 분열이다. 특히 그림자가 본체를 잡아먹는 듯한 형태는 실체화되지 못한 나머지들의 가치 전도를 꾀한다. 의자가 사람은 물론 사회적 위치라는 상징을 생각할 때, 상징적 질서에 대한 작가의 불만 또한 반영되어 있다. 예술가 입장에서 사회가 지정해준 자리나 정체성은 변화를 필요로 한다. 작가가 구멍 난 병과 하수도 망을 같이 배치한 것은 생성된 것이 무엇이든 막힘없이 흘러야 한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유약도 사용하지 않고 그냥 허옇게 만들어진 도자기들은 무엇인가 새겨지기 전, 또는 후를 말한다. 그런데 원래 그것이 일회용 상품의 용기라는 모델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은 텅 비워진 셈이다. 

출시된 상품이 자기를 구입해 달라고 요란하게 떠든다면, 정체불명의 이 하얀 용기들은 침묵한다. 또는 무의미한 소음이긴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백색소음이다. 몸통에 뚫린 구멍은 무엇인가 사용되었다는 표시인 펀칭을 떠올린다. 용기 자체가 몸과 비유된다면 그것은 외부로부터 보호되는 튼튼한 경계를 허물어버린 취약한 상태다. 동시에 이러한 상태는 살아있는 것의 특징인 안팎의 소통을 암시한다. 섬유를 이용하여 구멍 밖으로 흘러넘치는 듯한 액체를 암시한 것은 여러 겹의 의미를 내포한다. 생명은 닫혀있으면서도 열려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닫혀있다가 열리는 상태는 인류학이나 종교학에서 오염, 죽음, 열락, 확장, 금기 위반 등등으로 관념화되곤 한다. 굿같이 다른 차원과 접속하려는 행위의 절정에서 이처럼 존재의 경계를 넘어오는 것들은 극적 효과를 자아낸다. 문혜주의 작업은 경계를 넘나드는 근본적 체험을 도예나 현대적 사물(상품)로 표현한다. 

도시 곳곳에 하수를 처리하는 빗물받이를 무속에 쓰이는 사물과 연결시킨 것은 원시와 현대 모두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어떤 육체적,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성/ 속, 순수/ 오염 등의 구별을 비롯하여 명확히 구별되어야 할 경계에서 어중간하게 걸쳐 있다. 눈에 띄지 말아야할 비체(abject)는 종교적 신비와 숭고의 체험과도 공유된다. 경계를 유지해야 하는 조직은 이러한 위반의 상황을 금기시하기도 하고 신성시하기도 했다. 금기는 조직의 보호를 위한 것이지만, 어떤 금기도 완벽하게 지켜질 수 없다. 또한 어떤 조직이든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두 가지 상반되는 요소는 한 몸체에 공존하기 마련이다. 예술 또한 같은 방식이다. 하지만 현대미술이 금기 위반을 상시화하면서 금기가 금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선정적인 사건으로 소비되는 함정에 빠지곤 한다. 하수를 처리하는 빗물받이에 걸쳐 있는 선적 다발들은 망을 통과하지 못한 쓰레기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모델은 무속적 도구에서 왔다. 

현대에도 부족 생활을 하는 소수민족에서도 볼 수 있는 숱이 많은 술 형태의 사물은 탈혼망아에 이르게 하는 푸닥거리를 극적으로 표현하게 한다. 빗물받이 형태에 걸쳐 놓은 길쭉한 것들은 무신도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유일신의 이미지와 상반된다. 자기가 믿는 것만을 강조하는 근본주의가 21세기에도 여전히 반목과 전쟁을 낳는 것은 무신도를 낳았던 다신교같은 다양한 중심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작가는 정전과 교리 중심의 지배적 종교 배후에 신비와 이단 등으로 분류되어왔던 종교적 체험에 주목한다. 이러한 흐름이 인간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다. 성적 환몽을 꾸는 듯한 표정과 포즈를 한 성 테레사 수녀의 법열은 가장 유명한 예다. 하지만 세계를 뒤흔든 감염병 사태는 체액이 교환되는 이러한 원초적 체험을 다시금 금기시할 것이고 위반은 또 다른 차원에서 벌어질 것이다. 금기는 도자기처럼 깨지곤 한다. 문혜주의 작업은 무엇인가를 담는 용기를 다공질로 제작함으로서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최근에 많이 사용하는 의자라는 도상도 마찬가지다. 명백히 인간을 떠올리는 의자는 기괴하게 변형되었다. 이번 전시에 붙인 부제인 [스펙타클 사이비 휴먼]은 깨져야 할 금기 중의 하나로 휴머니즘을 지목한다. 이미 현대의 과학과 기술은 인간이라는 유비를 벗어났지만, 여전히 인간은 문화적 관습의 기준으로 작동했다. 그런데 그 인간이 진정한 기준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다. 유일신이 문제되었듯이, 그러한 유일신의 반영 상인 인간이 가부장적 남성이라는 점이 문제다. 더 정확히는 백인, 남성, 어른, 이성애자, 비장애인이다. 타자에 배타적인 주체-동일성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의식은 생산력과 기능만을 중시하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단기적 전망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작가가 키워드의 하나로 지목하는 ‘스펙터클’은 인간이라는 중심을 이미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스펙터클은 인간을 재료로 삼고 단순한 소비자의 역할에 머무르게 한다. 도자를 비롯한 예술적 작업은 하얀 도기들처럼 유령화되고 그림자화 되었지만, 작가는 이러한 주변적 위치에서 새로운 자리를 만들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