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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누스또 는 

 당신은 그 곳에 가보셨나요? 라는 질문이 여러 겹으로 마주하게 되는 전시다.

문자로 기록된 언어구조 속에서 맥락을 파악하며 이해하듯 

관객들은 실생활에서 사용하며, 접촉하였던 사물의 유사함에 이끌려 개인이 겪었던 특정

지점을 상징하고 있는 무대로 들어선다. 

 

 여러 사람이 스쳐가며 자취가 덧대진 전시 공간 속 구조물과 물건들은 개발정책으로 더 이상 물리적 접촉을 기대할 수 없음이 커져가는 감정을 엿보게 한다. 전시는 외력에 의해

사라지고, 변화하며 기억으로 전이 될 그 곳을 작품으로 지시하는 구조를 연출한다.  

우아한 미소와 여유를 나누는 삶을 기대하기보다 준비되지 못한 채 낯선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분리불안 심리가 스며들어 있다. 

 

 무대에 등장한 조형물은 단순한 반복과 지속적인 움직임이 쌓이며 남겨진 흔적을 드러낸   

화려하지 않은 동작의 결과, 하지만 유사함 속 작은 차이를 스틸사진처럼 나열된 리듬감이

움직임으로 감지하게 한다. 조심스럽게 가는 가닥을 말아 올려 덩어리로, 말랑한 점토를

온도를 높여가며, 서서히, 서서히 수분을 덜어내며, 부드러웠던 물질의 감촉은 딱딱하게

변해버리면서 물성은 시신경으로 감각부위를 이전시켜 머릿속에 새겨두게 된다.

 

 작품들은 설치되기보다 위치하고 있다. 실생활에서 익숙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 사물들은

사실적 묘사로 성형되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보다 유사 대상을 지시하는 행위를 조성하고

있다. 고정된 사물이 아닌 특정 공간에서 쓰임으로 친숙하게 접촉했던 과거 사건을 되돌려

놓은 것이다.

 

 언어가 실체를 지시하지만 언어구조와 작동 문법이 엮여지며 의견이 교환되듯, 사실이라는 것과는 연관성을 상실해 가며 애달프게 간직하려 했던 대상은 언어처럼 치환된다. 작품들은 온전히 실체를 유지하지 못한 채 사라져가는 대상을 지칭하며, 변해버린 주변 환경과 엮여져 있는 사소한 자신과 연관됨을 되새길 수 있게 하는 안내자 역할을 하게 된다.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던 물질이 사라지고 흙을 주무르며 접촉한 표면에 작가의 살갗 무늬가 기록된 흙덩어리를 강렬한 압력과 불길 속에서 구워 자신의 흔적을 고착시킨다. 

더 이상 감정을 담아 낼 수 없는 자기磁器는 이전에 지녔던 그 너그러움이 아닌 감정이

지워진 듯 하얗고 더 이상 변형이 불가하게 견고히 만들어진 기호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유한한 대상을 무한한 물질로 변환시키는 행위로 사라져가는 대상에 대한 안타까움 이면 어느 한 곳에는 영속적으로 저장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인체의 감각기관을 통해 기억된 경험이 도자라는 물질로, 그리고 그 사물들은 이질적 공간에 설치되면서 작품들은 순간 기억을 불러들려 주변과 결합시키는 언어화 방식으로 연동되는

예술구조에서 작가의 조절 능력을 만나게 한다.

 

 

                                박 무 림

                                정다방프로젝트 기획자

  90년대에 미술에 관련된 사람들이나 가끔 돌아다니던 한가한 동네 사간동, 지금은 한복 입은 외국인 관광객이 가득 돌아다니는 동네에 전시 리뷰를 부탁받고 오랜만에 다시 돌아왔다.

다행히 문혜주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는 삼안 갤러리는 조금 들어간 곳에 위치하여 옛날 사간동의 느낌이 남아있었다. 좁은 골목을 들어가면 한옥을 개조한 아담한 카페가 나온다. 삼안 갤러리는 그 카페와 함께 운영하는 곳이다. 인테리어뿐 아니라 카페 곳곳의 물건들-테이블, 의자, 찻잔, 손잡이 등- 모든 것이 작품인지 의심이 들 만큼 하나하나 취향이 묻어나는 물건들의 공간이었다. 

  그런 공간이었기에 문혜주 작가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공간 속에 녹아있었다. 작품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공간 구석구석이 다 특별함 투성이었다. 카페 안쪽에 하얀 백자들이 줄지어 있었고 금색의 테를 두른 그릇들을 발견하고 이것이 카페의 물건이 아닌 문혜주 작가의 전시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들어오던 입구의 철망 진열대에 걸려있던 검은색, 흰색 커피잔들은 <우리는 끊임없이 남겨진 것들을 본다>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커피 머신 뒤 작은 선반에도 무심한 듯 <썩어가는 모과와 버린 물감> 작품이 놓여있었다. 카페의 모든 소품과 가구와 함께 작품은 원래 그 곳에 있어 마땅한 것들처럼 조용히 놓여있었다. 

 카페에서 전시하는 것이 유행한 지 한 20년은 된 듯하다. 필자도 미술 전시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장사’가 카페라 생각하여 갤러리와 카페를 한 공간에서 운영한다. 카페 공간의 특성상 벽이 많고 음식물로 작품이 훼손될 위험이 적고, 세련된 디자인의 가구들과 미술 작품이 그런대로 잘 어울린다. 경제적 여유 있는 사람이 그림 한 점이라도 사줄까 바라는 기대로 아무도 오지 않는 전시장을 벗어나 카페라는 장소에서 전시를 해본다. 하지만 이런 막연한 기대로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카페 인테리어 비용을 줄이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렇기에 다시 한번 문혜주의 작품을 보며 왜 작가는 카페에서 전시를 하고 싶고 관객은 커피를 마시며 작품을 보고 싶은지 고민하며 감상하였다

  그녀의 작품들은 카페에 있음 직한 형태다. 커피잔, 항아리, 물병 등, 얼핏 보면 고급 카페에 있음 직한 반짝이는 백자에 금색으로 멋을 부린 도자기들이지만 자세히 보면 우리가 매주 일요일 쓰레기통에서 분리수거하던 그것들이다. 드럼 세탁기 전용 세제, 다 쓴 올리브유와 비니거 유리병, 겨울 내내 먹었던 유자차 빈 병, 비듬 제거를 위해 사용했던 샴푸 등등 현대 공예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소재들이었다. 작가는 1년 전 거의 매일 출근하던 단골 카페 VENUSTO가 망해 쓰레기들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며 필요에 의해 사용되고 버려진 뒤 어딘가로 떠나가는 물건에 대해 집착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쓰레기를 가져와 그 모양의 도자기를 천천히 만들고 금색 안료를 사용하여 멋을 부렸다. 관객은 커피를 마시며 맞은편에 있는 작품을 하나씩 보면서 화려한 백자가 원래 어떤 형태였는지 브랜드는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도자기의 형태 출처를 맞춘 뒤

이 것을 만든 작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왜 버려지는 물건을 소중히 한 땀 한 땀 만들어 사간동 카페에 전시했는가?” 

 두 번 우연한 기회에 문혜주 작가의 작품을 보았다. 첫 번째는 유니온아트페어였다. 폐공장이던 곳을 전시장으로 만든 공간에 그녀의 백자는 좌대가 아닌 시멘트 바닥에 놓여있었다. 백자의 발산하는 화려한 기운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 본 작품들은 물레질로 제작된 깔끔하게 윤기 나는 그릇들이 아니었다. 거의 작가의 지문이 보일 듯이 흙 터치가 드러나도록 엄지와 검지로 꼭꼭 눌러 만든 유리병과 잡초 도자기가 있었다. 멀리서 느꼈던 화려함과 달리 가까이서 본 작품은 오랫동안 꾹꾹 참아온 억울한 죄수의 심정처럼 조심스러웠다. 작가 노트에도 손으로 천천히 만드는 그녀의 작품 제작방식이 마치 현대인의 ‘버티는 삶’을 보여준다고 한다. 

 문혜주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손을 가만두지 못해 조금은 산만하지만 미술 작가로는 적성이 딱

맞는 학생이었다. 손이 바쁜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일부러 물레나 캐스팅 방식을 쓰지 않고

두 세배 시간이 들어가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그렇기에 그녀가 만든 작품은 어떤 용도와 형태를

갖춘 완성품이기보다 그 형태까지 완성 되어가는 과정이다. 마치 수행하는 수도자의 마음으로

손가락으로 흙 한 줌을 집어 엄지와 집게로 조금씩 성형하며 어디로 가버린 지 알 수 없는 우리

주변의 버려진 물건들의 형태를 기억한다. 물건들의 수의를 만들어주는 듯하다. 그 시간과 마음이 너무 정성스러워 물건도 좋은 곳으로 갔을 거라 희망해본다.    

 

 그녀의 작품은 카페 공간이 익숙해지고 뜨거운 커피가 미지근해지면 스멀스멀 형태들이 말을

건다. ‘우리는 원래 카페에 없었던 물건이야.‘라는 소리가 들리면 비로소 작품을 바라보게 되고

우리의 일상 공간에 틈이 벌어진다. 아주 잠깐 아주 작은 틈이지만 그 틈으로 버려진 물건들을

생각하고 애도한 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너무 슬픈 마음으로 문혜주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 하얗고 얇고 앙증맞은 사이즈의 컵으로 에스프레소를 마신다면 기분 좋은 감촉으로 행복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녀가 카페에서 전시하는 이유인 듯하다. 

임 성 연

무소속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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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cked up>, 175 x 15 x 200cm, 자기질점토, 종이박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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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끊임없이 남겨진 것들을 본다>, 48 x 48 x 155cm, 자기질점토, 석기질점토,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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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가는 모과와 버린 물감 >, 55 x 3.6 x 36cm, 자기질점토, 수금, 캔버스에 유화, 2019

 다시 만났을 때 친구는 선물이라며 조그마한 종이팩을 건넸다. 그 안에는 습자지로 겹겹이 두툼하게 감싼 무언가가 있었는데 정성스러우면서도 대충-그러니까 무성의해 보이면서도 꽤 의도적인 느낌이었고, 그 느낌은 묘한 지점에서 편하고 매력적이었다. 친구는 작가가 직접 포장한 것이라 했고 나는 이 선물이 누군가의 창작물이라는 얘기에 더 구미(口味)가 당겨져 집중하고 조심조심 종이뭉치를 풀었다. 구겨졌던 종이가 펼쳐지면서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섬세했고, 그 안에서 도자기 재질의 하얗게 반짝이는 에스프레소 사이즈의 잔이 있었다. 뭐, 워낙 센스가 넘치는 친구가 준 선물이니 그럴 만도 하다만, 구부(口部)가 동그랗지 않고, 손으로 한 땀 한 땀 빚었음이 그대로 드러난-비뚤비뚤하게 잘 만들어진-하얗게 무성격적이면서 반짝이는 그 잔은 마음에 들었고(그것은 포장에서도 느껴졌던 덤덤한 정성이였다), 뭔가 짝을 맞추고 싶은 마음에 혹시 하나 더 구매할 수 있는지 친구한테 물었고, 그렇게 이것은 문혜주 작가의 작품이며, 곧 개인전 할 것이며-그때 구매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정보와 함께 이 전시를 기대하게 되었다.

 갤러리 앞에 도착하니 입구의 쇼윈도에 내가 며칠 동안 궁금했던 선물 받은 잔의 짝들이 바로

눈에 띄었다. 수십개의 잔들은 마치 전철역의 악세사리 진열대에 걸려있는 것처럼 회전 가능한 수직 행거에 열 맞춰 걸려있었고, 행마다 사이즈가 크고 작게 반복되어 있었고, 좌우면으로 흰 잔과 검은 잔이 있었다.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아니나 다를까 잔들은 제각기 미세하게

다르게 생겼고-내가 현재 개인/집단 정체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중이라서 그런지-그 전체로 봤을 때의 통일감과 세부적으로 봤을 때의 서로 다름은 '개체'와 군중 사이의 의미에 대한 메타포로 읽혔다. 진열대를 포함한 그 비주얼이 가지고 있는 개념적인 조형성 때문에 이를 단순 도/공예작품으로 볼 수 없었고, 그래서 공예에 대한 무지함으로부터 오는 경외심을 어느 정도 눅잦히고 내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동시대미술 읽기의 방식으로 괴리감 크게

없이 읽을 수 있었는데 그건 새삼스럽지만-신기하고 기분 좋은 부분이었다.

   공간에 들어서니 따뜻한 조명 빛이 감도는 실내에는 친구와 작가 및 그 일행이 차 마시면서

편히 대화 중이었고 추위가 갓 시작되는 날씨여서인지 난방을 조금은 과하게 틀었고, 그게 왜

기억에 남는지 생각해보니 군데군데 설치된 작품들은 그 온기 가득한 환경 속에서 대조적으로 차갑게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바로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전시장 내의 도자기들은 유심히 보니 생수병, 세제통, 우유팩 등 일상에서 너무 쉽게 접하게 되고, 너무 흔해서 기억조차 잘하지 않게 되는 그런 용기(容器)들이었는데, 그것들은 '생성된' 것이 아니라 '지워진' 것으로 보였다. 들어서자 느꼈던 차가움은 기본적으로 익숙한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 그보다 선행적으로 인지하게 되는 표상적 특징들이 '지워져서' 느껴지는 생경함이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무표정, 무성격, 무영혼의 상대를 만났을 때 느껴지는(시체를 볼 때 느끼는) 그런 차가움이다. '실재'와 '영혼'에 대해 생각을 떠올리며 작품들을 보고 있자니 이것들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이것들을 이제 무엇

으로 봐야 하는지, 애초에 이것들을 당연하다시피 무언가로 쉽게 판단 내린 것에 대해서 일종의 반성과 함께 당당했던 인지 판단력이 묘하게 전도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가치(價値)가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서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기존의 당연했던 정의가 무의미해지는 시점에서,

나는 함께 온 일행들과 '지워져버린' 이것들이 원래 뭐였는지 맞춰보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은

퀴즈 푸는 듯한 재미가 있었고 동시에 흡사 죽은 것에 대해 그 살아있을 때를 추모하는 듯한 아련한 슬픔도 느껴지는 감정 속에 혼재되어 있었다. 이 '물건'들을 보면서 과연 나는 무엇을 맞추고 있었던 것인가? 나의 기억? 나의 삶? 나의 취향? 완전히 평범해지고 나서 특별해진다는 것,

주변에 존재하면서도 기억에 남지 않는 것, 나는 이 아주 생소한 것들을 보면서 일상의 하찮은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슬프지도, 유쾌하지도 않는 기분과 함께 좀처럼 진입하기 어려운-존재하지 않는 '사이'의 차원에 들어가는 듯했다.

 간만에 좋은 전시 관람을 하고 벅찬 마음으로 나의 작업실로 돌아와서, 작가한테 직접 받은 까만 잔과 기존에 선물로 받았던 하얀 잔을 탁자 위에 나란히 놓고 문혜주 작가의 작업이 왜 좋았는지를 다시 생각해본다.

 새삼스럽지만, 작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들일까? 삶과 예술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까? 나에게 있어서 작업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부여받은(누가, 왜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삶을 깨닫기 위해 하는 일종의 수행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 수행의 과정에서 오는 내적 실현의 즐거움 자체만으로도 만족하고 환희를 느끼며 예술을 숨쉬기와 같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기를 작업을 하고 있는 나한테 바래본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과정에서 이정표마냥 남는 소위 '작품'들은 같은 길을 거쳐 가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위로, 공감, 토론의 플랫폼이 되어 이 영문 모를 삶에서 오는 불안과 고독을 다소나마 치유해 줄 것 같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과 작가로서 작업한다는 것, 그 두 신분과 신분에 따르는 행위가 괴리 없이 합치될 때, 비로소 진실함을 바탕으로 참된 작품이 작가와 관객 사이에서 생긴다고 본다. 그러니까, 나는 (어디로 향하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내가 가는 길의 어느 구간에서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작업, 예술에 삶을 의지하고 있는 문혜주 작가를 만난 것은 아닐까?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 하얗고 까맣고 울퉁불퉁하고 비뚤비뚤한, 솔직한 에스프레소 잔을 보면서, 그 영원히 안 풀릴 듯한 아련함 속에서 다시, 또다시 생각해본다.

HUANG HAOBIN

​설치미술 작가

 한국에서 재개발 구역에 산다는 것은 삶에 수반한 허무를 매일 마주하게 되는 일이다.

나의 작업실은 서울시 성북구 삼선동 5구역 재개발 단지에 있다.

올해부터 정비 사업이 시작되어 이 공간을 비롯한 주변의 땅을 딛고 있는 모든 것들이

차례대로 사라질 것이다.

약 1년의 시간이 주어진 이곳 레지던시에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미술로 말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2018년 12월 18일, 작업실과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베누스또를 방문하게 되었다.

동네 카페에 원두 몇 그램을 사러 갔던 나에게 맛보라며 주인이 내려준 커피는

놀라운 정도로 맛있었다. 그제야 왠지 텅 빈 카페 내부를 둘러보니

음악의 선율, 커피향기, 얼마를 거듭해서 축적되었을 특유의 분위기 등

삶에서 느낄 수 있는 많은 기쁨이 그 공간 안에 있었다.

 하지만 한 달 후면 이곳은 빠르게 그리고 영원히 사라진다.

그는 다른 곳에서 영업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자신이 쏟아 부은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게 됐다는 사실 때문에

새로움을 찾아 나설 기운을 잃었다고 하였다. 그 말에 허탈함이 짙게 배 나왔다.

쏟아 부은 것은 고작 돈 뿐만이 아니라 그가 삶에서 체득한 지혜와 열정 그 전부였으리라.

지금 이 공간에는 허무함, 상실감, 배신감 그 모든 애증의 감정이

주인의 가빴던 삶과 함께 뒤엉켜있을까? 하는 처연한 생각에 주위를 살피자니

구석구석 채워진 물건들이 새삼 생명을 얻은 듯 선명하게 드러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토록이나 짙게 누군가의 흔적이 된, 이 작은 것들은 전부 어디로 가게 될까?

 

 원래부터 그곳이 제 자리인 듯 존재를 뽐내는 물건을 보면,

우리는 종종 사람의 손길이 묻어있다고 말한다.

손길, 정성, 애정, 생기, 삶 같은 밝은 것들이 허무를 마주한 순간 그것들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앞으로 남은 한 달, 매일 베누스또를 방문하면

나는 내던져진 모든 것들의 방향을 알아낼 수 있을까?  

두 번째 개인전에 붙이는 말

문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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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녔던 삶 >, 실제정물크기, 자기질점토, 수금,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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